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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행, 당산나무같은 조선여인
    세상 (Life)/지식 (Knowledge) 2010. 1. 13. 01:00

    신선행, 당산나무같은 조선여인

     

     

    길진섭이 그린 <어머니 초상> 유화, 1955년작

     

    그림에서 만나는 부인의 이름이 신선행이다. 조선 기독교 역사의 영적 기초를 놓았던 거인 길선주목사의 부인이다. 1932년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에서 선생을 하다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를 지낸 길진섭이 <어머니초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길진섭이 서울대학에서 교수를 하다 1948년에 북으로 넘어 간 이후 1955년에 그린 그림이니 1864년생인 그녀의 나이로 아흔 한살 때의 모습이다. 당시 나이로 치더라도 장수한 셈이고 강건한 모습은 마치 면전에 마주 대하듯 장대한 기골이며 청정한 촌 아낙의 모습이다. 그녀는 박천강 하류가 넓게 흐르는 곡창지대 안주에서 태어났다. 흔히 조선역사에 여성의 탄신이나 서거를 기리는 법이 없으니 태어날 나라도 잘 골라야 하는 가보다. 사진조차 귀했던 시절, 화가인 아들을 만나 그림으로나마 세상에 얼굴을 남겼으니 아주 특별한 복을 타고난 여인이다.

    신선행의 나이 열여섯 살이던 1880, 혼례를 치룰 때 신랑 길선주는 고작 장난꾸러기를 벗어나지 못한 열한 살배기였다. 다섯 살 손아래 남편과 햇수로 55년을 함께 살았다. 왜냐하면 질병에 대한 면역이 부족했던 시절 설사나 폐렴만 앓아도 죽고 말던 그 당시 형편으로는 해로한 셈이다.그녀 역시 세 명의 아들 딸들을 열병과 전염병으로 잃고 큰 아들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후유증으로 요절하는 남다른 아픔마저 있었다. 평생 네 자녀를 가슴에 묻고 살았던 신선행이야말로 동네 어귀에 늘어진 당산나무처럼 살아온 전형적인 조선여인이라는 경외감마저 든다.                         

    1935, 길목사께서 예순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녀의 삶은 결코 밖으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대현교회에서 4년 가까이 전도사 생활을 하고 길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갖으셨던 방지일 목사께 여쭈었더니 부인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셨다. 길목사께서 1926년 이래 계속된 장대현교회 분규로 교회를 사임한채 부흥사로 전국 교회를 돌며 사역하시던 때였다.

    더우기 당시 관습으로는 남녀가 유별하여 칸막이를 하고 예배를 보던 시절이었다. 초기 평양에서는 남성들은 널다리교회, 여성들은 사창골 교회에서 별도의 예배를 드렸다. 후에 양교회가 합쳐져 새롭게 장대현교회로 통합하였을 때 ㄱ자 형 건물로 남녀의 앉는 자리를 구별하였던 에피소드마저 있다

    신선행에게 평생 믿음이란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릇 여인에게 있어 남편이 종교였던 시대였던 만큼 딱히 이 여인에게 종교의 의미를 묻는 게 잘못일런지도 모른다.

    그녀가 서른 다섯에 예수를 영접하기까지 음양의 이치를 따른다며 몇 해를 도인처럼 살던 남편을 따라 선도(仙道)에 심취했다. 한 때 염세적인 삶을 살던 길선주는 관성교와 선도에 심취해 둔갑술에 빠지거나 차력사 노릇도 하고 주역을 통달한듯 신통한 도인의 모습이었다. 신혼 이후 이십년 가까운 결혼 생활동안 남편의 기이한 행적은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지만 이미 평양 바닥에서 도인처럼 행세하던 길선주의 아내 역시 선도를 맹신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야말로 여필종부요 남편이 하늘같았던 시대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이 믿음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길선주가 이길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1897 815. 아들 길진경이 쓴 책에는 그로부터 11개월 이후에야 그녀 역시 시어머니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매일 구령 삼정을 주문외우며 살아온 그녀가 한순간에 개종을 한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길선주는 1897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장댓재교회 성전 건축이 끝난 1901년에 장로장립을 받았다. 어데 그뿐인가? 그 이듬해 전도사격인 조사에 취임하면서 1907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회 졸업생인데다 그해 자신이 장로요 조사로 사역하던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요 천지개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목사가 되기까지 겨우 10년이었지만 그 기간에 그녀의 남편이 이루어 놓은 사역의 열매는 조선 기독교 영성운동의 활화산같은 정점에서 주옥같이 빛나는 성령의 역사였다.

     

     

     

                          

    1900년 시공, 1901 6월에 봉헌된 장대현교회의 측면 사진. 외벽을 완료한 상태의 모습으로 미루어 1901 3월경으로 보여진다. 광주 제중병원을 세운 로버트 윌슨의 아들인 스튜어트가 보관하던 자료

     

    장대현교회에서 1906년에 시작한 새벽기도의 열풍이 조선 구석구석에 군불을 지피울 때 신선행의 새벽은 언제나 타오르는 불쏘시개였다. 장대현 강단에서 들려지는 말씀 말씀 한마디가 하늘의 소리요 부인에게는 단비와 같았던 은혜였다. 비록 남편이 독립운동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을지라도, 남편의 옷자락에 묻은 피고름을 빨 때 그녀는 언제나 행복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남편에 대한 존경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이 없었던 들 이들 부부의 사역이 가능하였을까? 남편이 선도 수행중 다른 여자와 외도에 빠졌을 때에도 신선행의 남편에 대한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누룩같이 번진 영정 부흥과 교회 성장의 기저에는 건실하고 정직한 길선주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데 그뿐인가? 조국독립을 향한 헌신으로 기독교는 절망속에 길을 잃었던 이 민족의 소망이요 미래를 향한 대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숨겨진 그녀의 기도와 헌신없이 길선주의 성령행전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그런데 1935년 길선주목사의 소천이후, 특히 해방과 분단의 와중에서 신선행 부인의 행적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자녀들의 삶의 궤적으로 미루어 91살의 부인이 다시 떠올랐다.

    해방이후 둘때 아들 진경을 따라 월남하지 않고 평양에 남았던 가보다. 특히 1948년 이후에는 공산당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무렵이어서 기독교인들의 처신이 매우 힘들었을 무렵이다. 오히려 생존의 위협을 느껴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탈출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 의식이 강했던 셋째 아들 길진섭이 서울에서의 안정된 직장과 미술인으로서의 명예를 뒤로하고 월북을 자행했다.

    길진섭(吉鎭燮)이 누구인가?

    목사인 아버지가 그림그리는 일을 한사코 반대하다보니 뒤늦게 우에노의 동경미술학교를 들어가 1930, 40년대 조선화단에 그 이름 석자를 풍미했던 화가였다. 일제가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제정했던 선전(鮮展)과 맞서 우리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목일회를 조직하고 근원과 이종우, 리쾌대와 이중섭, 장발등과 더불어 식민통치 아래에서 붓으로 저항했던 민족화가였다. 만약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쪽에서 살았더라면 길진섭은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최고의 작가로 대접받는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그는 해방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격렬했던 남한 사회에서 서울대학게 적을 두고 남조선 미술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월북하던 해 해주에서 초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더우기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조선미술동맹 부위원장으로 창작미술가 이상으로 조직과 선전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가 1955년에 그린 <또 다시 조국 진군의 길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김일성 우상화와 선전을 위해 제작된 혁명적 선전화로서 당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사회주의는 어찌보면 지성인들이 항일운동에 신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처럼 미래를 꿈꾸는 젊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사상적 경향이기도 하였다. 평등과 노동자 계급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의 완성은 자본가 계층에 수탈되는 소수 계층의 정의를 대변하는 매력적인 사상적 흐름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 완성과 공산혁명의 최전선에서 길진섭은 자신이 선택한 공산국가에서 신명을 바쳐 일했다. 더우기 개인 우상 숭배를 금기시하는 기독교 가정에서 양육받고 숭실학교를 나와 누구보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그였다. 정주사람 이명룡장로의 딸 경건양과의 사이에 태어난 두 딸에게 길목사가 지어준 이름이 춘영이와 근영이다.

    아들이 북한 사회에서 소위 승승 장구하고 잘나가는 지위에 있을 때 어머니 신선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새벽마다 기도하던 장댓재교회 터는 인민 소년궁전으로 변했고 길목사가 이 땅에서 마지막 고별예배를 드렸던 이향리교회(신현교회로 개칭)1941년에 폐쇄되고 말았다.

    비록 예배할 공간으로서 교회당은 잃었지만 신선행이 믿음을 저버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일성 우상화의 최선봉에 섰던 아들의 어깨 너머로 하나님께 드렸을 어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을까?

    오늘 신선행의 모습에서 조선 최초의 대형교회의 사모도, 독립운동가의 아내도 아닌, 하늘의 복을 넘치도록 누리고 사는 믿음의 여장부가 아들을 축수하고 기도하는 애틋한 모성을 보게 된다. 탕자를 대하여 탕자라 말하지 않고 끝까지 연민하는 모습으로 대했을 그녀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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